2008/10/27

CAMPARI

2003년 처음 맛보고 아직도 그 맛을 잊을수가 없다.
빨간 빛깔의 색에 먼저 끌렸고, 결코 가볍지 않은 첫맛에 끌렸고, 쌉싸름한 뒷맛에 끌렸다.
저녁 식사와 함께 마셨던 기억이 나지만, 원래 이 술은 식전주로 한두잔씩 하는 술이라고 들었다.

이후 이 술을 찾기위해 인터넷 등을 뒤져봤으나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하는 업체가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 최근에 소량으로 들여오는 업체를 발견하여 주문하고 말았다.




아래는 CAMPARI에 대한 검색 결과 (출처는 네이버 백과사전)

요약
이탈리아의 가스파레 캄파리가 만든 리큐어의 브랜드.
본문
가스파레 캄파리(Gaspare Campari)는 1828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누오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부터 투린에 있는 바스 바(Bass Bar)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절에 그가 만든 비터스(Bitters: 약용으로 쓰이는 술)가 캄파리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가스파레는 밀라노에 정착하여 두오모 앞에 가게를 열고 아직 브랜드명이 없었던 캄파리를 팔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쳐 더욱 맛이 좋아지자 경쟁 카페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그는 다른 카페에 자신의 술을 캄파리 비터스(Campari Bitters)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라는 조건을 걸고 제품을 공급했다.

가스파레는 1860년에 그루포 캄파리(Gruppo Campari)를 설립했으며 1892년에 최초의 공장을 설립했다. 1904년에는 세스토 산 조반니(Sesto San Giovanni)에 두 번째 공장을 설립했다. 캄파리는 현재 25개국의 45개 공장에서 생산되어 190여개국에 팔리고 있다.

이탈리아의 국내 브랜드였던 캄파리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공시킨 사람은 가스파레의 아들인 다비데(Davide)였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리나 카발리에리(Lina Cavalieri)를 사랑한데서 비롯됐다. 리나가 세계공연을 다니는 동안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 다비데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 다녔고 가족들에게는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그녀의 공연지였던 프랑스의 니스에 캄파리의 첫 번째 해외지사가 세워졌고, 그 후에도 러시아, 뉴욕 등 그녀가 가는 곳마다 해외지사가 늘어나게 되었다.

오리지널 캄파리는 허브, 향신료, 식물의 뿌리, 과일껍질, 나무껍질 등 60 가지 이상의 재료를 알코올, 물 등과 혼합하여 만든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 비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러나 캄파리의 매혹적인 붉은 색상은 선인장의 진홍색 수액을 먹고 사는 연두벌레를 말려서 얻는다고 알려져있다. 캄파리의 쌉싸름한 맛은 식욕을 촉진시키므로 와인과 더불에 대표적인 아페리티프(식전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캄파리 앤 오렌지, 캄파리 앤 소다, 네그로니, 아메리카노 등의 칵테일 재료로도 사용되고 있다.

2008/10/24

축가 - 그대에게 by 김영준

10/25(토) 오후 1시에 외환은행 본점
절친한 후배의 부탁으로 결혼식 축가를 부르게 되었다.
올해 들어 네번째 부르는 축가인 것 같다.

내 축가는 언제나 내가 만든 곡 "그대에게"이다.
2000년도에 이 곡을 만든 동기도 어떤 분의 결혼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만든 첫번째 버젼에는 그 분의 결혼 상대자였던 "경희" 라는 이름도 코러스로 살짝 들어갔다.
이후, 3~4번의 다른 버젼으로 편곡했고, 내 1집 CD에는 라운지 버젼의 "그대에게"로 수록되었다.

축가를 부르기 전 날은 몇시간을 들여 연습을 한다.
늘 부르던 노래라 많은 연습은 필요없지만 이 곡을 녹음할 당시의 느낌을 기억하기 위해 연습을 하는 편이다.
이 날을 위해 기다린 두 사람이 맺어지는 순간을 이 곡을 통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

=======축가 후기========
10/25(토) 오후 1시 결혼식에서 축가 잘 부르고 왔습니다. ^^
많은 분들이 격려해 주셔서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결혼하신 두 분에게 좋은 선물이 되셨길 바랍니다.

2008/10/20

안전지대 (安全地帶 V)

남자들이 가을을 타듯이 나도 가을에는 감성적이 되는 것 같다.

밤 9시, 하루종일 기다렸다는 듯이 집에 오자마자 꺼내든 安全地帶 V 더블 CD.
맥주를 마시며 Disc 2의 첫 곡부터 한곡 한곡 빠짐없이 들었다.
왜 Disc 2를 먼저 듣냐고?
Disc 2를 듣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Disc 1의 맨 마지막 곡 "ほゝえみ"를 마무리로 장식하고 싶어서...

들으면서 느낀 감정은, 역시 이 시대의 불멸의 음악가야말로 타마키 코지가 이끈 安全地帶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마약을 하고 만든 음악이랄까, 두 장짜리 앨범의 중간 중간에 녹아든 곡들은 맨 정신에 들을 때와는 다르게 맥주 한잔 걸친 상태일 때 더욱 정신이 바짝 들면서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가을, 어딘가로 달리고 싶다면 이 음악을 추천한다.
당신의 중추신경을 케냐의 사막으로, 아프리카의 도박장으로, 지중해의 밀림으로 안내할 만한 음반이다.

2008/10/06

[스크랩] ‘맥’으로도 보고싶다 [한겨레 2008.10.03 제729호]

이 글은 애플포럼에서 활동하시는 "상큼김쌤"님께서 한겨레 21(729호) 인권OTL 숨은인권찾기 꼭지에 "'맥'으로도 보고싶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하신 글입니다.

우리나라의 웹 표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라면, 한국의 맥 사용자들이 (맥에서 지원되지 않는 게시판, 결재 시스템 등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아실 것입니다.

국제화 시대라는 말이 시작된 지도 한참 전의 일입니다.
MS사의 익스플로러와 윈도우즈 위주의 독점은 하루빨리 우리나라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취지로 이 글을 스크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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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숨은 인권 찾기] ‘맥’으로도 보고싶다 [2008.10.03 제729호]
[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18]

얼마 전, 아는 후배가 여행을 다녀왔다며 여행기를 첨부해서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여행이 어땠는지 궁금해 첨부파일을 다운받으려고 보니 확장자가 ‘hwp’, ‘한글’ 문서다. 나처럼 ‘한글’을 구입하지 않은 매킨토시(맥) 사용자는 안 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윈도가 아니면 ‘한글’ 뷰어도 없는데…. 관공서가 아닌 개인한테까지 시위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문서 못 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비슷한 경험이 생각나 씁쓸했다.
지난해 대선 때, 시험 준비 때문에 고향 집에 갈 수 없어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려는데 신고일을 몰랐다.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갔는데 공지도 없고 답답했다. 한 일주일 잊고 지내다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신고 마지막 날. 늦은 공지일자에 어이없고, 맥에서 깨지는 홈페이지에 황당하고, 아무 배려 없이 ‘한글’ 문서로만 된 신청서 공문에 화가 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12월13일 부재자 투표일에 부재자 투표소로 갔다. 홍보 시기, 웹 접근성, ‘한글’ 문서의 폐쇄성 등을 거론하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했다. 선관위 소속이 아닌 많은 공무원분들이 “참고하려 한다”며 관심을 보여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지역 선관위는 사과와 시정 약속은커녕 무단 채증(?)에 “타당하면 연락주겠다”며 ‘인적사항’까지 요구했다. 덕분에 화가 났는데 어떤 높아 보이는 사람이 와서 “문서가 안 열리면 되는 곳에 가서 열면 되는 것 아니냐”며 훈계를 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공문을 내가 따로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열어야 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반박에 “전화로 민원을 넣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이 정도 일이 있었으니 선관위도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총선 즈음해서도 홍보 외에는 바뀐 것이 없었다. 기가 차서 중앙선관위에 직접 전화를 했더니 민원 게시판을 활용하라고 한다. 들어가보니 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웹브라우저로는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없었다. 쓸 수 있다 해도 몇 개월 전에 올라온 광고글투성이로 전혀 관리가 안 되는 게시판이니 쓰나 마나 아닌가?

결국 다시 전화해 ‘한글’ 문서로 된 공문을 PDF 파일로 변환해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번엔 금방 처리해주었지만,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전산 담당자는 윈도 외의 다른 운영체제와 그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항의를 받은 뒤에야 조처를 한 것일까?

웹 표준을 지키고 웹 접근성을 조금만 높이면 모두가 평등하고 편하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문서도 ‘열린 문서 캠페인’에서 이야기하는 표준 문서 포맷(TXT・PDF・ODF)을 쓰면 윈도를 안 쓰더라도 누구나 읽거나 쓸 수 있다. 모든 운영체제에서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픈 오피스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왜 인터넷이나 전자문서에서 윈도만 기준으로 할까? 하긴 정부기관이 웹 표준(또는 웹 접근성)을 무시하고 익스플로러와 윈도만 생각해 독점을 방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으니…. 그나저나 이 친구는 내가 문서 못 연다고 답장 보낸 지가 언젠데 왜 아직 답이 없어?

김기홍 한겨레21 16기 독자편집위원